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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회장 별세 삼성 이건희 회장의 일대기

by □☆ 2020. 1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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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그룹 이건희 회장 별세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이 오늘 오전 병세 악화로 별세했습니다. 오랫동안 몸이 안 좋아서 장기 투병했던 이건희 회장은 오늘 서울 일원동 서울삼성병원에서 별세했습니다. 

 

2014년 급성심근경색으로 입원한 후 6년동안의 투병생활을 거쳤는데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고 이건희 회장은 1987년 삼성창업주인 이병철 회장 사망 이후 삼성을 이끌어 왔습니다. 

삼성은 이건희 회장 취임 전까지 국내에서만 힘을 발휘하는 기업이었으나 그가 삼성을 이끌기 시작한 이후로 세계적인 기업이 되었습니다. 전세계에서 이제 삼성전자는 네임밸류가 되었죠. 

 

이건희 회장의 어린시절

 

이건희 회장은 1942년 대구에서 태어났습니다. 부산사범초등학교를 다니다 5학년 때 일본으로 유학을 떠납니다.

 

이건희 회장은 일본 유학 시절 레슬링에 빠져서 2년 동안 레슬링 선수도 했었습니다. 서울사대부고 재학 시절 1959년에는 전국 레슬링대회에서 웰터급 출전, 입상을 하기도 했습니다. 스포츠에도 관심이 많았고, 스포츠 정신에서 교훈을 얻어 자신만의 경영 철학을 말하기도 했었습니다. 

 

홍사덕 전의원에 의하면

 

"건희는 말도 잘 안 하고 떡두꺼비 같았어.

건희가 먼저 붙자고 한 싸움이었지.

내가 심판을 봤어. 싸움을 붙으니 건희가 힘이 좋았어."

 

라며 그에 대한 일화를 이야기한 적도 있었는데요. 

홍사덕 의원은 이건희가 어린 시절 말은 없는 편이었지만 승부를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이건희 회장의 삼성 회장 취임

 

1987년 삼성은 이건희 회장의 취임으로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이건희 회장이 한 유명한 말이 있죠. 

 

"내가 회장에 취임한 이상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

 

 

이건희 회장은 혁신적인 사업가로서 삼성의 모든 것을 다 바꿨습니다. 당시 40대 중반이었던 그가 삼성을 완전 변화시킨 거죠. 삼성이 지금 휴대폰 시장에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도 이건희 회장의 힘이 컸습니다. 삼성전자에서 애니콜을 내고 나서 휴대폰에 큰 힘을 쏟았습니다. 그는 불량이 있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고, 수원 공장에서 직원들이 지켜보는 데서 150억 원어치의 불량 휴대폰을 태운 일화가 있습니다. 

 

삼성은 신경영으로 완전 탈바꿈했습니다. 반도체 부분뿐만 아니라 금융, 병원 등 삼성 그룹 전체의 규모가 커졌습니다. 이건희 회장은 창의적인 인재를 키워야 한다고 늘 주장했습니다. 그 이후로 많은 기업들이 창의적 인재 키우기에 핵심을 두었죠. 지금 역시 창의적 인재들이 대두되고 있습니다. 인재 경영에 관심이 많았고 삼성 임직원도 직접 뽑으며 면접을 6시간 이상씩 볼 정도로 열정적이었습니다. 삼성이 지금처럼 클 수 있던 것에는 이건희 회장의 노력이 컸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번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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